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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우연

한동안 케이크 만들기에 재미를 붙였던 적이 있다. 케이크 만들기에 시도하기 전 연습 삼아 쿠키를 만들어 봤는데, 레시피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운 쿠키가 너무 힘이 없어 건들기만 해도 반 토막이 나버렸다.

두 번째 시도 때는 레시피와는 다른 밀가루를 썼고 세 번째와 네 번째 시도 때는 초코칩 양과 호두 양을 조절했고, 그렇게 해서 이제는 레시피 없이도 쿠키를 만들고 비 오는 날이면 오븐에서 막 꺼낸 과자 냄새가 생각나는 나쁜 버릇까지 생겼다.

 

 

그날은 케이크 틀을 사러 윌리엄 소노마에 갔었다.

베이킹 섹션이 계단 위로 올라가 오른쪽에 있다는 말에 나는 느리게 그쪽으로 옮겨갔고, 거기에는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케이크 틀을 들고 서서 점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밀리아라고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나를 빤히 봤는데, 나를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어색했던 몇 초가 흐른 후 그녀의 얼굴에는 내가 기억하는 미소가 퍼졌다.

몇 해 만이었지만 늘 그랬듯이 그녀의 짧은 머리는 살짝 말려 있었고 항상 고집하던 빨간 립스틱도 여전했다.

그녀는 나를 안았고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졌다며 놀라 했다.

그녀는 나에게 그간이 안부를 물었고, 학생 때 내가 좋아했던 것들, 내 취미,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새삼 가깝게 느껴졌다.

 

그날 그녀와 헤어진 후 집에 오는 길, 난 그녀가 내 삶의 일부분이었던 그때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았다.

인턴이 되어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 그녀가 때마다 해주었던 선물들,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갔던 백화점 꼭대기 층 식당에서 내려다본 눈부시던 여름날의 센트럴 파크.

일 년 반의 시간 동안 좋은 일만 있었을 리 없었겠지만, 고마운 일뿐일 리 없었겠지만, 어째서 남은 건 좋은 기억들 뿐이었다.

 

 

 

그녀를 그렇게 우연히 만나고 몇 주가 지난 후였다.

그녀의 오피스 근처에서 버스를 타게 되었고 나는 그녀 생각이 났다.

내릴 때가 되었는지 확인하려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버스는 얼마 전 우리가 마주쳤던 윌리엄 소노마를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반가워했고 그녀는 말했다. “나 방금 네 생각했는데.”

신기한 일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몇 번의 우연이 나와 그녀를 만나게 한 이후 나는 문득 우리도 우연히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네가 궁금하지 않은 게 아닌데, 네가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닌데도 내 마음은 그랬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우리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덜컹거리지 않을까. 언제쯤 나는 그리웠던 너를 우연히 라도 한 번쯤은 봤으면 하고 바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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