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었다.
한동안 여러 매거진에 뉴욕에서 제일 근사한 뉴 레스토랑이라고 소개되었고, 그걸 읽고 웹사이트를 찾아봤는데, 웹사이트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그곳의 낭만이 마음에 들어 포스트잇에 메모를 해 놓았었다.
그날은 사월이 다 지나도록 느낄 수 없었던 봄의 흔적이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한 기분 좋은 봄날이었다.
레스토랑 안은 기대했던 대로 낭만적인 기운이 충만했고,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근사했다.
벽 쪽으로 진열된 와인 병들, 열린 문으로 불어오는 봄바람, 나무 의자와 탁자들의 조화, 뒷마당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웃음소리. 완벽한 봄날이었다.
아이다도 분명 부벳을 마음에 들어할 거라 나는 확신했다.
할 얘기가 있다고 했던 아이다가 문을 통과해 내게로 오는데 얼굴이 어두워 마음이 덜컥했다.
아이다는 열한 살 때 세네갈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속 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은 늘 했었다.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했고,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게 더 많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마음이 통했던 건, 처음부터 서로에게 끌렸던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다는 어렵게 얘기를 시작했다.
“책에서 읽었던 일들이 나한테 일어났을 때, 그때는 정말 충격을 받았다. 단 한 번도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
어디에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근데 지금 난 그때 마주했던 벽보다 더 높고 견고한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아.”
나는 아이다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평소의 그녀 답지 않은 말이었고, 희망을 잃은 듯한 말이었고, 또 많이 상심한 마음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내가 미국에 와서 다니게 된 초등학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름을 딴 학교였다.
당연히 흑인 학생이 대부분이었고 그 아이들은 낯설고 신기한 하나뿐인 동양 아이인 나에게 친절했지만 옆 반 아이 하나가 중국어 흉내를 내며 약을 올렸다. 몇 번을 그랬을까.
그건 처음 당하는 일이었고, 마음이 많이 상했었고, 그러다 하루는 약이 제대로 올라 그 아이를 쫓아갔다. 옆에 있던 동생이 내 손을 잡고 가지 말라는 눈빛으로 나를 봤는데 나는 그래서 더 가야겠다 마음먹었던 것도 같다.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려 놓고 그 아이는 당황을 했는지 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아이를 붙잡아 세워놓고 너 왜 그래? 그러며 따지고 들었다. 아이는 당황을 해 아니야 놀리는 거… 말을 흐렸고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지만 할 줄 아는 영어가 고작 그뿐이었다.
패주고 싶었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그곳은 너무 낯선 곳이었다.
나는 그때 일을 아이다에게 말하진 않았다.
아이다의 얘기가 계속되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느 날 지금 아이다가 느끼는 상심을 느끼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 난 어떻게 해야 될까.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열린 문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햇살 때문이었는지 바람 때문이었는지, 아이다의 얼굴도 한결 편해 보였다. 상처 받은 마음을 끄집어내 햇빛에, 바람에 말리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