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 번 있는 그녀들의 모임에 가지 못했던 건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들의 모임은 늘 일요일이었으니까.
주디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임이 있을 거라는 메일이 왔고, 어쩌다 보니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나는 그녀들을 알고 지낸 지 오 년 만에 처음으로 그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웬만큼 예상을 했지만 그녀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내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낯선 얘기들 뿐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 댁 지하실에서 찾았다는 편지들의 내용만 들어도 그랬다.
2차 대전 때 전쟁터에 나가 있는 아들이 보낸 편지, 자동차라는 걸 운전하고 다니는 아들에게 조심하라 당부하는 편지… 나이도, 출신도, 직업도 다른 그녀들이 모여서 나누는 얘기는 그만큼 다양했다.
그녀들의 인연은 정확히 십오 년 전쯤 시작되었다. 태미는 자신이 자란 동네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매달 한 번씩 아이들과 책을 읽고, 만들기를 하고, 피자를 시켜 먹었다. 그 후 한 명씩 그곳을 찾아왔고, 어떤 이들은 매달 그곳에 돌아갔던 것이었다. 그날 그곳에 모여 브런치를 먹는 여자들 모두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고, 주디는 그 모임에서 태미의 가장 오랜 친구 그리고 우리 중 제일 어른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 다니게 된 이후 그녀들이 서로에게 일어나는 일생의 가장 큰 일들과 사소한 일들을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때로는 축하해주고 또 때로는 위로해주는 모습을 말이다.
결혼이 있었고, 아이의 출생이 있었고, 부모의 죽음, 또 얼마 전에는 이 모임 안에서의 죽음이 있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많은 일들 앞에서 우리는 늘 하나였다는 거, 그것만이 그날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였던 거 같다. 아무도 주디,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던 것도 그녀의 부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리 모두의 마음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테니까.
주디 얘기 대신 그녀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얘기를 했다. 얼마 전 태미는 십오 년 전 보던 아이가 대학생이 된 모습을 보고 굉장히 감동했었고, 웬디는 여섯 살 때부터 자신을 따르던 아이가 이제는 커서 그곳에 오지 못하는 나이가 된 것에 대견하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 가지 신기한 건, 어떠한 이유로 그곳의 멤버이던 누군가가 떠나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가 신기하게도 채워진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늘 보던 누군가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을 매달 기다렸다. 바빠서 잠시 못 왔던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곳을 영영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몇 달을 계속 나오면 머릿속으로 그 사람을 우리 중 한 명으로 받아들일 마음에 준비를 나는 하곤 했다. 만남과 헤어짐도 때로는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 갑자기 오지 않을 때 드는 그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태미가 주디가 쓰던 이름표를 주디의 사촌에게 건네면서 울음을 터트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십오 년 동안의 만남과 헤어짐,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쳐 갔을 테지만 이번 헤어짐이 태미에게 얼마나 어려운지, 마음 아픈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