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이면 배달 온 신문의 여행 칼럼을 펼쳐보며 여행 가이드를 읽는 재미에 즐거웠던 때가 있다. 그때 내가 매주 여행 가이드를 읽으면서 했던 일은 공책에 리스트를 쭉 적어가는 일.
언젠가는 그 공책을 펼쳐놓고 여행 계획을 세우리라 생각하며 했던 일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했던 때였다.
뉴욕에 가을이 왔고 특별한 일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에게 문자가 왔다. 불쑥한다는 말이 주말여행을 다녀 오자는 얘기였다.
사춘기를 같이 앓고, 여자 형제가 없는 내게 그 역할을 해준 언니와 단 한 번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다는 걸 그때 기억했고, 조금은 갑작스러웠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않은 미숙함 때문이었을까. 가까운 곳으로도 여행 준비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우선 어디에 갈 건지 정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가을의 허드슨은 뉴욕 사람들 모두가 원하는 주말 여행지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차리고,, 그러는 동안 숙소는 구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우리는 주말여행을 포기하고 대신 당일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우리에게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기도 했다.
오전 8시
토요일 아침잠을 겨우 밀어내고 아침 8시에 도시를 떠났다.
한 시간만 가면 단풍이 너무 멋져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베어 마운틴이 있다고 했다.
도시에서 그렇게 가까운 곳에 그런 멋진 곳이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종종 그런 뜻밖의 일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오전 9시 10분
정말 한 시간 뒤에 우리는 도시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등산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는지 산길은 고요했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들이 우거져 해를 가렸고 열린 창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마를 그렇게 올라갔을까.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정상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고 보니 내 머리 위로는 파란 하늘이, 그리고 아래로는 눈부시게 빛나는 허드슨 강이 보였다. 그 굉장했던 그림을 어떻게 해 보려고 카메라를 들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엔 카메라를 내려놓고 바위 위에 걸 터 앉았다. 사람들이 왜 이곳을 찾아오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에서, 이 굉장한 자연 앞에서 이상할 만큼의 평온을 경험하기도 할 것 같았고, 이곳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을 것 같기도 했다.
산을 내려가는 길에 나는 내 마음에 아주 오래 남을 그림을 보게 되었다. 올라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내려가던 중, 한 노인이 피크닉 의자에 앉아서 내가 방금 봤던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았다. 난 그 노인이 자주 그렇게 혼자 거기 앉아있다 돌아간다는 것과, 오늘도 그렇게 앉아 있은 지는 꽤 됐다는 걸 짐작했다. 그의 뒷모습이 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노인의 쓸쓸해 보이던 뒷모습이 그곳의 아름다움 때문에 더 마음에 걸렸다.
오전 10시 반
세븐 레이크 드라이브.
호숫가 드라이브는 그 완벽했던 가을날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인 것만 같았다. 도로에 차를 세워 놓고 끝이 보이지 않았던 호수를 보기도 했고, 음악을 틀어놓고 메일을 체크하며 한동안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서늘했던 가을바람이 피부에 닿는 그 느낌은 정말이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언니는 예전에 키우던 거북이 몸집이 커져서 이곳에 데려다주었다는 얘기를 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난 언니가 거북이를 키웠던 적이 있나 생각해봤지만 정말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렇게 우리에게도 서로에 대해 몰랐던 일이 있었다.
오전 11시 50분
여행 칼럼에서 읽었던 대로 점심때는 콜드 스프링이라는 타운을 찾아갔다. 타운을 찾아가는 내내, 도착해서도, 우리는 그곳의 앙증맞은 모든 것과 작은 타운의 분위기를 마음껏 누리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면서도 도시를 떠나서 살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건 왜일까.
오후 2시 45분
허드슨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였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한참을 걸었다는 건 분명했는데 말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또 조깅을 하는 사람들. 모두들 자기 방식대로 다리 위를 건너고 있었다.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궁금해 나는 난간으로 다가가 내려다보았고,, 순간 아찔했다. 그 위에서만 느낄 수 있을 강바람은 내 몸의 모든 세포를 깨우는 듯했다..
저 멀리 산과 강, 끝이 어딘지 모르는 먼 곳을 바라보며 다음 허드슨 여행 때는 더 멀리 가보겠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후 5시 30분
사과 농장을 배경으로 한 식당이라는 게 마음에 들어 찾아가는 시간이 짧지 않았지만 꼭 거기에서 저녁을 먹고 오늘 일과를 마치고 싶었다. 동네 식당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슬리퍼를 신고 차를 몰고 와 저녁에 먹을 빵을 사가는 그런 곳이었다. 손님과 종업원이 나누는 대화가 그 모든 걸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서는 정말 사과 농장이 보였고, 들 고양이 한 마리가 사과나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사과 농장 뒤로는 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을 올라가면 아마 동화 속 같은 마을이 있을 것 같았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곳의 노을을 뒤로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금세 해가 졌고 우리가 그 동네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길은 어두워졌다.
기억에 남을 하루를, 가득한 하루를 보낸 기쁨에 마음은 뿌듯했다.
집으로 가는 길 밤하늘에 달이 유난히 낮게 떠 있었다. 꼭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